현실 담은 잿빛 '백조의 호수'…치유의 깃털이 객석 뒤덮다

오연희 0 2,950
마이클 키간-돌란의 아일랜드판 '백조의 호수' 리뷰

아일랜드 연출가 겸 안무가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지난달 29~31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무용극 '백조의 호수'에는 동화 속 환상 대신 우울하고 거친 현실이 담겼다.

화려한 궁전 대신 회색 시멘트 벽돌 하나로 집을 그렸고, 잘생긴 20세 왕자 '지그프리트' 대신 직업도 희망도 없이 홀어머니와 살아가는 36살의 '지미'가 등장한다.

아일랜드 연출가 겸 안무가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는 고전발레의 대명사 '백조의 호수'와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는 비슷하지만 순백색 튀튀(발레 치마)와 낭만적인 차이콥스키 음악을 의도적으로 지운 채 병들고 잔혹한 현실 사회를 무대 위에 올린다.

그러나 폐허 같은 무대가 끝날 때 즈음에 관객들이 치유와 위로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하다.

공연 시작부터 파격이다. 팬티 차림의 아일랜드 유명 영화배우 마이클 머피는 목에 밧줄이 묶인 채 콘크리트 블록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염소 소리를 낸다.

그는 이후 소녀들을 성추행하는 성직자, 부패한 정치인, 폭력적인 경찰 등 1인 5역을 연기하며 작품을 이끈다.

무용극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연극, 음악, 무용, 독특한 몸짓 등이 모두 뒤섞인 융합극에 가깝다.

노르웨이와 아일랜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3인조 현악 밴드 '슬로우 무빙 클라우드'의 음악, 고전발레와는 거리가 먼 무용수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움직임, 검은색을 주로 사용한 무대와 의상, 담배 냄새 등은 공연 내내 쓸쓸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일랜드 연출가 겸 안무가 마이클 키간-돌란의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 제공]

 

후줄근한 운동복을 입고 등장한 '지미'는 정부의 주택 공영화 정책으로 집까지 잃게 되자 호수에서 총으로 자살하려고 하지만, 그 앞에 백조가 된 '피놀라'와 그녀의 동생들이 나타나며 잠시나마 희망과 사랑을 꿈꿔본다.

'피놀라'는 성직자에게 성추행당한 뒤 그 일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자매들과 함께 백조가 되는 저주를 받았다.

저주로 백조가 된 네 자매 이야기는 아일랜드 전설 '리어의 아이들'에서 가져왔고, '지미' 캐릭터는 2000년 아일랜드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 카티 사건'(존 카티는 정부의 주택 철거 계획에 반발해 무장한 채 경찰과 대치하다 사살당함)을 토대로 했다.

상처와 비극이 가득한 두 사람이 함께 추는 서정적인 파드되(2인무)는 화려한 기교가 없음에도 뭉근한 감동을 안긴다.

공연은 끝날 때까지 '아름다운 반전' 같은 걸 마련하지 않는다.

지미는 결국 주택 철거에 반발하다 경찰들에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고,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잠깐의 암전 뒤 무대와 객석에는 새하얀 깃털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무용수들은 6㎏에 달하는 깃털 뭉치들을 가지고 춤을 추기도 하고, 객석에 장난처럼 뿌리기도 한다.

눈보다 느리고 가볍게 떨어지는 깃털들의 폭격에 객석은 놀라고 당황하지만 이내 웃음이 번진다.

죽음과 비극을 정화하는 깃털이고, 객석을 치유하는 깃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 속에도 다시 한 번 '아름다움'과 '동화'를 믿게 하는 힘을 지닌 깃털이기도 했다.

sj997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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